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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역사유적지구 - 익산 미륵사지, 국립익산박물관전라, 광주/관광, 교통 2021. 12. 5. 10:54반응형
이 글은 이전 포스트(아래의 링크)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서울 #용산역 에서 KTX를 타고 약 1시간을 달려 도착한 #익산역 .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이번 여행의 첫 목적지인 #미륵사지 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대중교통편을 이용해서 익산역과 미륵사지를 왔다갔다 할 경우, 버스 배차 간격이 긴 편이라 시간표를 잘 확인하고 다녀야 하는데요. 이 날은 뭐가 그렇게 귀찮았는지(...) 시간표도 확인을 안 하고 대충대충 돌아다녔어요.
그래도 다행히 익산역에서 미륵사지로 갈 때는 타이밍이 아주 잘 맞아서 거의 바로 버스를 타고 미륵사지로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다시 역으로 돌아올 때는 바로 앞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을 기다렸답니다 ㅠㅠ 가급적이면 버스 시간표를 꼭 확인하시고 버스 시간에 맞춰 일정을 계획하시기를 바라요.
익산역에서 버스로 대략 50분 정도를 이동해서 미륵사지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소개할 미륵사지를 비롯하여 #왕궁리유적 등 익산에 남겨진 백제 시대의 유산들은 대체로 왕궁면이나 금마면 등 현재의 익산 시내와는 거리가 꽤 많이 떨어져 있는 곳에 점점이 흩어져 있어요. 게다가 버스 배차 간격도 긴 편이라서 대중교통으로 하루 안에 익산에 있는 백제 유적들을 다 둘러보기는 어려운 편이지요.
그래서 이 날은 욕심내지 않고 미륵사지만 둘러보기로 했어요. 미륵사지 바로 옆에는 최근에 개관한 #국립익산박물관 이 있는데요. 이 박물관에는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유물 외에도 인근 지역에서 발굴하면서 나온 유물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날 직접 가보지 못한 다른 유적들은 이곳에 전시 중인 유물을 통해 간접 체험하기로 했습니다 :)
먼저 미륵사지 먼저 둘러보기로 했어요.
절터 앞에는 이곳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음을 알리는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습니다. 2015년, 익산의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은 공주, 부여의 백제 유적들과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공주의 #공산성 또한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된 유적 중 한 곳인데요. 최근에 다녀온 곳이라서 포스트 링크를 함께 남겨둡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미륵산 아래에 자리 잡은 미륵사는 7세기 전반에 세워진 백제의 사찰로, 지금은 석탑과 당간지주만 각각 두 개씩 남아있는 황량한 절터입니다. 하지만 기단이 남아있는 빈 터를 보면 그 규모가 상당히 넓어 창건 당시에는 굉장히 거대한 사찰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륵사는 거대한 규모로 지어졌는데요. 무려 3개의 탑과 3개의 금당이 나란히 배치되고, 그 뒤로 강당, 승방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규모도 크고, 구조적으로도 독특한 절이었습니다.
창건 당시 미륵사의 모습은 국립익산박물관에서 재현된 미니어처를 통해 짐작해볼 수 있었습니다.
미륵사의 남문터가 있는 방향으로 쭉 걸으면 동, 서 양쪽으로 조성된 연못을 지나게 됩니다.
연못을 보니 미륵사 창건 설화가 생각이 났어요.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무왕이 왕비와 함께 용화산 아래의 큰 못가를 지나는데 갑자기 못 가운데서 미륵 삼존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를 본 왕비가 이곳에 절을 짓자고 제안하여 무왕이 이를 허락했다고 하는데요. 지명 법사에게 못을 메우는 일에 대해 물으니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절을 짓게 되니 그 절이 미륵사라고 하지요.
이 설화와 관련하여 왕이 실제로 무왕인지, 왕비는 누구인지 등 다양한 학설이 있다고 합니다만, 어쨌든 이 절터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미륵사의 기록과는 같은 곳입니다.
아마 문이 있었을 터를 지나 곧바로 서쪽에 서 있는 석탑으로 향했습니다. 제가 미륵사지에 온 것은 미륵사지 서탑으로 불리는 이 석탑을 보기 위해 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ㅎㅎ
현재 국보 제 11호에 지정되어 있는 미륵사지 석탑은 현재 남아 있는 국내 최대의 석탑이자, 가장 오래된 백제의 석탑이기도 합니다. 창건 이후 여러 차례 수리를 하며 온전한 형태로 유지되어 온 것으로 보이나,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에 벼락을 맞으면서 거의 붕괴 직전의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특히 탑의 서쪽면의 상태가 심각했는데요. 일제는 이를 임시로 보존 처리하기 위해 콘크리트를 덮어서 더 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최선의 방식이었으나 어쨌든 제대로 된 보존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2001년부터 해체 및 보수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미륵사지에 찾아가도 콘크리트로 덮인 탑이든, 서쪽면에 무너진 탑의 모습이든 제대로 볼 수가 없었는데요. 마침내 18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친 복원 작업이 완료되어 일반 대중에게 그 모습이 공개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사진으로만 보던 미륵사지 석탑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으니 꼭 직접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이번에 방문을 하게 된 것이지요 ㅎㅎ
이미 소실된 부분들이 있어서 원래 몇 층짜리 탑이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어서 전체 복원이 아니라 현재 남아있는 6층까지만 복원하기로 했고, 또 무너진 서쪽면은 상태가 괜찮은 동쪽면에 맞춰 부분적으로 복원하기로 결정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복원이 되었습니다. 즉 2001년에 해체하기 직전의 상태에 최대한 가깝게 복원하게 된 것이지요.
복원된 석탑을 직접 눈으로 보니 거대한 규모에 놀랐습니다. 사진으로는 짐작하기 어려웠던 그 크기를 직접 실감했던 것이지요. 남아있는 6층까지의 높이는 14.2m 정도 된다고 합니다.
가까이에서 보니 옥개석의 부드러운 곡선도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깎기 힘든 단단한 화강암을 재료로 사용해서 마치 목조 건축물의 지붕처럼 모서리 끝을 살짝 치켜올려 놓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감탄을 했어요. 돌로 만든 목탑(???)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미륵사지 석탑은 한반도에 등장한 초창기 석탑으로, 아직 한반도 석탑 스타일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라 목조 건축 기법을 사용하여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이후에 등장하는 석탑들은 점차 크기가 작아지면서 독자적인 석탑 양식으로 발전해나가게 되지요. 미륵사지 석탑은 아직 한반도 지역의 독자적인 석탑 양식이 자리잡기 전에 세워진 과도기적인 성격을 갖는 석탑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탑 내부에는 진신사리가 여전히 봉안되어 있다고 해요. 그래서 출입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사리가 들어있던 금제 사리용기와 함께 발견된 다른 유물들은 현재 국립익산박물관에서 소장 및 전시 중인데요. 하필 제가 갔을 때 사리 용기 중 바깥쪽 사리 용기인 금동제 사리 외호가 #국립중앙박물관 에 출품되어 있어서 보질 못했습니다 흑흑...
서탑 맞은 편에는 동탑이 서 있습니다. 동탑은 이미 오래전에 완전히 형체를 잃고 소실된 상태여서 본래 빈 터로만 남아있었다고 하는데요. 1990년대 초에 새롭게 복원했습니다.
다만 남아있는 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서탑과 쌍둥이 형태였을 것이라고 짐작하여 서탑의 모양을 기초로 하여 9층으로 복원해냈을 뿐만 아니라, 현대식으로 대략 2년 정도만에 급하게 만들어낸 탓에 전통적인 미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현대의 창작물이 만들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동탑은 실제의 동탑의 모습이라고 보기 보다는, 맞은편에 있는 서탑이 9층 형태로 온전히 남아 있었다면 이런 형태였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정도로만 보면 되는 것 같아요.
그나마 좋은 점을 꼽자면, 문화재가 아니다보니 내부로의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ㅎㅎ...
그리고 절 터 한 켠에는 과거에 건축 부재로 쓰였던 돌들이 가지런히 놓여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미륵사지는 이 정도로 둘러보고, 이제 국립익산박물관으로 들어가서 미륵사지와 주변 유적에서 나온 유물들을 관람해보기로 했습니다.
터만 남아있는 유적을 관람할 때는 박물관도 함께 관람하면 좋아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과 모형들을 통해 유적지의 본래 모습을 상상하는데 훨씬 도움이 되니까요.
코로나 시국이라 방문자 등록을 한 후에 관람이 가능했습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로비에 비교적 큰 모형으로 복원된 미륵사지 목탑이 있었어요.
저는 상설전시관을 한 바퀴 둘러보았습니다. 상설전시관은 크게 3개의 섹션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관람 순서대로 익산백제실, 미륵사지실, 역사문화실로 운영 중이었습니다.
첫 번째 공간인 익산백제실은 익산에 남아 있는 백제 시절의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사비(현, 부여)에 수도를 두고 있던 시절인 7세기 전반에 익산은 백제의 신도시로 떠오르게 되는데요.
특히 무왕 대에 익산으로 천도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냐는 가설이 있을 정도로 이 시기의 익산은 백제의 중요 도시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는 앞에서 소개했던 미륵사지 외에도 왕궁리 유적과 #제석사지 , 무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쌍릉 등이 익산에 조성되었습니다.
위 유물들은 왕궁리 유적에 남아있는 #왕궁리5층석탑 에서 발굴된 사리함들이에요. 금이나 유리로 만든 것인데 아주 섬세하게 장식하여 예뻤습니다.
왕궁리 유적은 본래 어떤 용도로 사용되던 곳인지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다고 하는데요. 7세기 전반 백제 시절에는 궁궐 내지는 그 지위에 버금가는 별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고, 통일신라 시대에는 사찰로서 기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같은 석탑 안에서는 금동 불상과 청동 방울이 발견되었고,
금강경판도 석탑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세로 17.4cm, 가로 14.8cm 크기의 경판 19장으로, 금강경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왕궁리 석탑에서 나온 이 유물들은 대체로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고 해요. 그리고 현재는 익산 왕궁리 오층 석탑 사리장엄구라는 이름으로 국보 제 12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왕궁리 유적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제석사지 의 유물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제석사는 그 이름을 통해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을 모시던 사원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동시의 백제의 왕실 사원 혹은 호국 사찰로도 해석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쌍릉 중 하나인 대왕릉에 있던 나무널이에요. 재료는 일본에서 수입된 고급 금송이었다고 합니다.
이 무덤에서는 인골도 수습이 되었는데, 이를 분석한 결과와 무덤의 규모, 부장품 등을 토대로 이 무덤의 주인은 무왕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첫 번째 섹션을 보면서 익산에도 백제 관련된 유적지들이 많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유적들이 대부분 무왕과 관련된 것이어서 당시 무왕이 익산을 많이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관련 유적에서 새로운 유물이 발굴되고 연구가 진행되면 무왕이 익산을 어떤 도시로 키우고자 했는지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겠지요 :)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섹션으로, 미륵사지에서 나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탑만 남아 있는 미륵사지를 보면서 당시 미륵사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면, 이 섹션을 관람하면서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갈 수 있습니다.
먼저 백제 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사용된 수많은 기와들,
다양한 모양의 장식들과 같이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크고 작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것보다 위 사진에 있는 청동 말이 너무 귀여워서(ㅋㅋㅋ) 저건 저도 하나 갖고 싶었어요.
지붕 양 끝에 장식용으로 설치하는 치미 또한 미륵사지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치미는 궁궐이나 사찰 등 중요한 건물에서만 볼 수 있는 장식이지요.
미륵사지 서탑 내부에 있었던 사리장엄구도 이곳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위 사진은 탑을 해체하여 사리장엄구를 처음 발견했을 때의 모습을 재현한 모형이에요 ㅎㅎ 실제로 발굴하면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얼마나 감격스럽고 떨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이 작은 금판은 사리를 탑 속에 봉안할 때의 내용을 담은 사리봉영기로, 칼로 글씨를 새기고 그 위에 붉은색을 입혀 글자가 잘 보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섬세함이 느껴지는 유물이었지요.
이 사리봉영기를 통해 미륵사의 창건 주체가 무왕의 왕비였던 백제 귀족의 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는데요. 이에 따라 무왕으로 알려진 서동과 그의 부인으로 등장하는 선화공주의 이야기를 담은 서동 설화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었지요.
그런데 사실 당시에는 정식 왕비가 여러 명인 것도 가능하던 시절이라, 선화 공주와 서탑 창건자인 백제 귀족의 딸 둘 다 무왕의 정식 왕비였을 수도 있다고 해요 ㅎㅎ
사리 구멍에서 함께 나온 유리구슬들도 나란히 정렬되어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총 566개의 유리구슬이 사리 구멍에서 발굴되었다고 해요.
이 외에도 갖가지 보물들을 사리와 함께 사리 구멍에 넣고 봉안하였는데, 이것들은 당시 사리를 봉안하는 의례에 참석했던 관료들이나 귀족들이 시주한 것이 남겨진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다들 보석들을 시주하면서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요 :)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이라 하는 높이 30cm의 금동향로 역시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것인데요. 뚜껑 부분에는 구름 모양의 연기 구멍 네 개가 있어서, 안에다가 향을 피우면 구름 모양으로 연기가 피어올랐을 것입니다.
사진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몸통과 다리를 연결하는 부분에는 사자 머리 모양의 장식이, 다리 또한 사자의 다리를 형상화 한 장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완전한 형태의 향로가 출토된 것은 국내에서는 이 유물이 최초라고 합니다. 현재는 보물 제 1753호에 지정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섹션인 역사문화실은 따로 사진을 찍지 않았는데요. 익산과 군산 일대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주로 미륵사지와 백제 관련된 유물들을 둘러보기만 해서 이 섹션은 그냥 스치듯(...) 둘러보고 나왔습니다.
답사 목적이 아닌 관광, 여행을 목적으로 터만 남아있는 유적을 방문하면 생각보다 볼거리가 없어서 실망감을 느낄 수 있는데요. 미륵사지의 경우 새로 복원이 완료된 석탑 외에도 관련 유물들을 잘 전시하고 있는 국립 익산박물관이 바로 옆에 붙어 있어서 이것저것 볼거리가 많습니다.
저처럼 대중교통으로 이동할 경우에는 조금 불편하여 많은 유적지를 방문하기는 어렵겠지만, 자차를 갖고 방문하실 경우 인근에 있는 다른 유적을 함께 둘러볼 수 있어서 익산에 남아 있는 고대 백제의 흔적들을 함께 둘러본다면 보다 알찬 여행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미륵사지와 국립익산박물관만 둘러보고 다시 익산역으로 돌아와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게 되었는데요. 딱 이 두 곳만 방문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웠습니다 :D
※ 미륵사지 및 국립익산박물관 정보
주소: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로 362
찾아가는 방법: 익산역에서 버스 41, 60, 60-1, 60-3번 버스 탑승, #미륵사지 정류장에서 하차
관람시간: (박물관) 10:00-18:00
입장료: 무료
전화번호: 063-830-0900
홈페이지: https://iksan.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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